2021. 7. 14. 02:58ㆍ일상 생활
사람이 사람을 따뜻하게 배려를 하면서 사람을 그저 장비 기계에 필요한 소모품처럼
하찮게 여기고 생각을 하면서 필요가 없어지면은 잔인하게 버리는 일들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을 받으며 함께 어울리면서 앞으로 나아갈수가 있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희망을 하면서 그런 세상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
자신의 한몸을 불살라가면서 희생을 하시고 안타깝게 산화한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선생님입니다.
대한민국 인터넷 사이버 공간의 심각한 모습을 천천히 구경을 해보면 1970년에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선생님처럼 누군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이 스스로 일어서서
행동으로 옮기고 몸소 실천을 하셨던것처럼
용기가 없는 잡것들 , 잡놈들 아주 나쁜 겁쟁이와 똑같은 한심한 놈들이 얼굴과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고 익명의 한국 인터넷 사이버 공간에서 함부로 댓글 내용을 남겨서
故人 선생님을 모욕을 하면서 조롱을 해대는 꼴불견 모습을 보면은 외국인 분들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될까봐 얼굴이 저절로 빨갛게 변할 정도로 창피한 모습을 만날수 있었습니다.
자세히는 모르는 내용이지만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기념관 재단과 건물은
다른 지역에 있다가 지금의 서울특별시 지방 종로구 지역 청계천 주변에 건물로 옮겼다는
이야기를 들려오는 소문을 통해서 얼핏 들었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기념관을 찾아가본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왼쪽 고관절 다리가 아프고
중고로 구입한 하이엔드 카메라 광학 제품은 도저히 애정이 생기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사진 촬영을 하는걸 좋아해서 일상 생활 기록을 남기고 싶은데 카메라가 마음에 들지가 않으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한데 몸도 따라주지 않고 카메라 광학 제품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래도 관람 견학을 가보고 싶다고 외출 준비를 했는데 뒤늦게 찾아가보게 되었습니다.
중고 카메라 광학 제품은 아무리 애정을 주고 싶어도 마음에 들지가 않지만 기초 생활 수급자
고마운 도움을 받으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누군가에는 하찮게 여기면서 생각을 하는
돈이 될수도 있지만 대중 교통 버스 2,000원 차비가 없어서 뚱뚱한 남자는 어떤 날들은 돈이 없어서
병원에 놀러가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일들도 있어서 그놈의 웬수같은 돈이 없어서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기념관에 놀러가고 싶어도 갈수가 없었습니다.
1970년대에 노동법이 대한민국 법률에 명시가 되어 있어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업주가
많아서 근로법 노동 기준 법률을 더러운 발로 철저하게 짓이겨가면서 짓밟고 무시를 하면서
노동자 근로자의 인권은 끝없이 바닥으로 추락을 해버린 2021년 지금 현재도 마찬가지로
여전히 대한민국의 노동에 관련된 법률과 근로자를 대하는 모습은
뚱뚱한 남자가 사회 생활 경험은 부족하지만 전혀요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있게 이야기를 할수가 있습니다.
뚱뚱한 남자는 달동네에 거주를 하면서 형편이 어렵고 집이 가난해서 돈이 없어서
불알 친구 녀석들은 소중한 가족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서 1,000,000원에 가까운 비싼
운전 면허 학원을 다니면서 운전을 배우고 한국에서 배움이 필요한 모든 학교 과정을
편하게 수업을 들으며 배우고 다니면서 생활을 하는 모습이 부러워서 불알 친구 녀석들에게
어쩌다 가끔씩 분식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얻어 먹으며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 천천히
걸을때 하천 도랑에 물이 흐르는 모습을 보면서 서럽게 눈물을 흘리며 울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뚱뚱한 남자는 집안 형편이 어렵고 가난해서 돈이 없어서 고등학교까지는 그래도
학교를 졸업을 해야지 사회 생활을 시작할때 취업을 할수가 있는데 1990년에
신문 배달 일을 하면서 저녁에 야간 학교를 다닐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건을 내걸고
대전광역시 지방에 유명한 1960년에 창간한 지방 신문사 회사에서 운영을 하는
근로 장학생 제도에 지원을 하면서
신문 배달 부수:250부
신문 배달 시간과 근무 조건:토요일까지 근무 6일 근무 , 하루 5시간 자전거를 타고 신문 배달
한달 월급:30,000원
어떤 날들은 집에는 쌀이 떨어지고 밥이 없어서 굶고 나와서 하루종일 쫄쫄 굶어가면서
2년 6개월을 신문 배달 일을 하면서 노랑색 봉투에 담겨진 급여 돈은 10,000원 지폐 3장이
들어 있어서 돈을 받으면 모두 부모님에게 드려서 생활비에 쓰일수 있도록 보태 드렸습니다.
1990년에 공무원 월급이 2002년에 중소기업 2교대 근무를 하는 회사에 다닐때 급여와
똑같은 대한민국의 공무원들은 엄청나게 많은 급여를 받으며 직장을 다니고 있을때
대한민국 사회의 약자 , 소외 계층은 신문 배달 일을 하면서 비를 맞으며 추위에 떨어가면서
한달내내 일해도
신문 배달 급여는 30,00원~60,000원 금액을 받았습니다.
외국인 분들이 대한민국의 음지에 철저하게 감추고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비록 지나간
과거의 일들이지만 이런 대한민국의 노동법 법률이 존재를 하지만 제대로 지키지 않는
노동자
뚱뚱한 남자가 1990년에 학교를 다니는 아직은 얼라의 미성년자 나이에 제대로 노동법에
관련된 따뜻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한달에 작은 월급을 받아가면서 열약한 환경에서
일해온 1990년에 형아들 , 동생들이 거쳐간 근로 장학생 제도에 관련된 추억의 이야기들을
꺼내서 들려준다면 깜짝 놀랄겁니다.
그래서 그런가 아니면 지들이 근로 장학생 제도를 운영을 하면서 창피한 사실을 알아서
그런지 그래도 지방의 발전에 기여한 사실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는 의무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들이지만
뚱뚱한 남자가 신문사 회사에 근무를 하시는 상담원 누나에게는 미안한 잘못된 모습이지만
화가 나는 부분도 있어서 따지듯이 이야기를 하면서 근로 장학생 제도와 관련된 기록에
대해서 문의를 드리면 고의로 기록을 남기지 않아서 아무것도 기록은 남겨져 있지가 않습니다.
대한민국 중소기업중에서 아주 나쁜 회사를 살펴보면은
겨울 한파 영하로 떨어진 날씨에 복지 환경은 열약해서 탈의실은 지저분하고 추워서
옷을 갈아 입는 일들이 불편하고
심각한 회사는 점심 시간이 찾아오면은 정해진 식사 시간은 겨우 40분 주어지는 끔찍한
모습을 보여주고
생산 제조 현장에서 제품이 만들어지면서 불량이 생기면 수리를 하면서 고치는
수리 기사 업무를 맡은 파트 부서에서 일하는 병역 특례 젊은 얼라들 직원
무조건 강제로 근무 시간은 저녁 23:00까지 일을 시켜서 일찍 퇴근을 하면서 다음날
따로 불러서 심하게 잔소리를 시작하면서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고
토요일 날짜도 아침 일찍 09:00 출근 똑같이 저녁 23:00 늦은 시간까지 강제로 근무를 시키고
연차 휴가에 대해서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을 시켜서 제지를 하면서 심한 잔소리를 하시고
10kg이 넘어가는 무거운 전자 가전 제품 완제품 포장을 자동화 포장 장비 기계를
사용을 하면서 편하게 일을 할수가 있도록 생산 현장에서 일하는 얼라들을 배려를 하는
일들이 필요하지만 힘들게 모두 사람이 직접 손으로 테이핑 박스 포장 작업을 하면서
하루 일당은 겨우 45,000원(2010년 기준) (단기 아르바이트 근무를 하는 얼라들도 포함)
뚱뚱한 남자는 어렵게 취업을 했는데 노동법을 조롱하면서 비웃고 대한민국 노동 법률의
허점과 빈틈을 악용하면서 사전에 통보를 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사람을 해고를 시키고
노동청에 고발을 하지 못하게 강제로 사직서를 들이밀고 해고를 당한 본인에 자필과 싸인을
받아올수가 있도록 아웃소싱 파견 업체의 담당자에게 떠넘기고 일을 시켜서 대한민국 노동 법률을
유린을 하면서 가지고 놀고 계시는 악덕 중소기업
사람이 일을 하면서 먹는 음식을 잘챙겨주면서 먹여야 하는데 여전히 2021년 지금현재도
악덕 중소기업에서는 먹는게 부실하고 반찬이 없어서 주부님 사원분들은 따로 반찬을 챙겨와서
탈의실에 있는 냉장고에 보관을 하면서 식사를 하시고 계십니다.
(뚱뚱한 남자는 반찬이 없어서 밥만 보여서 생산 현장 관리자분께서 이야기를 하셔서
라면 부식이라도 챙겨달라고 식당에서 일하는 아줌마에게 부탁을 드렸는데 욕설을 들었던
2018년 12월 겨울 추운 날씨에 식당에서 당했던 서러운 일들은 아직도 기억속에 떠오릅니다.)
전부다 그런건 아니고 아직도 이렇게 악덕한 나쁜 중소기업 회사들이 사람이 사람을
배려가 아니라 필요가 없으면 수시로 해고를 시키면서 노동청에 고발을 하지 못하도록
대한민국의 노동법률을 가지고 악용을 하면서 근로자 , 노동자 , 사람의 눈에서 피눈물나게
만드는 그런 사례와 나쁜 모습은 2021년 지금 현재도 여전히 진행중입니다.
아직도 대한민국은 노동자 , 근로자 ,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현실속에서 만날수 있는 모습은
사람이 사람을 배려를 하면서 따뜻하게 반겨주는게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평화롭고
좋아진것 같지만 여전히 갈길은 멀어 보이고 제자리 걸음을 반복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기념관을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습니다.
뚱뚱한 남자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경계 지역에 있는 연세로 차량이 다니지 않는 거리에
자리를 잡은 고시원 가게를 나와서 271번 서울 대중 교통 버스를 타고 종로 3가 , 탑골 공원
목적지 버스 정류장에 하차를 하면서 내렸습니다.
바로 길 건너편을 쳐다보면은 1차 도로가 만들어진 골목길 모습이 보여서 횡단보도
보행자 도로를 건너서 1차 도로에 골목길로 진입을 하면서 조금만 걸어서 청계천 오염된
하천물이 흐르는 장소를 만날수 있는 방향을 향해서 천천히 걸으면 길이 끝나는 지점이
나타나고 오른쪽 방향에 바로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기념관 건물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몸이 아파서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에게는 종로 3가 , 탑골 공원 버스 정류장에서 출발을
하면서 조금은 거리가 멀게 느껴질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종로구 지역에 서울 종로 마을 버스가 운행을 한다면 1정거장 거리에 해당합니다.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기념관에 찾아갈려면 무작정 놀러가면은 안되고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
하루에 관람이 가능한 인원 제한
여기에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 먼저 확인을 하면서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기념관
관람이 가능한지 개관에 관련된 문의를 드려서 확인을 먼저 해보고 방문이 필요합니다.
중국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병이 대한민국 전국에 퍼져서 위험한 상황이라
사회적 거리두기에 관련된 단계가 격상이 되어서 높아지면은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기념관은 관람객 분들의 최우선인 안전을 위해서 입장을 막으며 휴관에 들어갑니다.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기념관 출입문을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서 폐관을
앞두고 있는 1시간 30분이 지나면 문을 닫는 늦은 시간게 놀러와서 관람과 사진 촬영에
대해서 가능한지 직원분에게 여쭤보면서 관람이 가능하다는 허락을 받아서 들어갔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기념관 1층 출입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와서
전시에 관련된 시설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구경을 하면은 방문자 시간을 내어서
놀러운 분들이 흔적을 남기면서 촬영한 사진 자료가 커다란 전시관에 마련된
벽면을 가득하게 채우고 있습니다.
몸이 아프고 거동이 불편한 분들을 위해서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기념관
건물 내부에 시설은 엘리베이터 장비 기계 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이동을 하는데
불편함은 없어서 괜찮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서울특별시
지정된 다양한 재단의 모습을 만나고 싶어서 놀러가면은 심하게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엘리베이터 장비 기계 시설을 갖추는 일들이 필요한데 처음에 공사를 시작하면서
엘리베이터 장비 기계 시설을 갖추지 않는 후원 재단 건물도 만날수 있어서
불편한 일들이 떠오릅니다.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기념관 건물 내부에는 엘리베이터 장비 기계 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자리를 잡은 전시관 시설을 찾아서
편리하게 이동을 할수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기념관 건물에 도착을 하면서
3층에 전시관 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천천히 관람을 하면서 둘러볼수가
있도록 전시 시설을 갖추고 만들어졌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기념관 1층에 출입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와서
안내 데스크에서 근무를 하시는 직원분에게 사진 촬영에 대해서 먼저 허락을
받아도 3층 전시관에 도착을 하면은 엘리베이터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왼쪽 방향 구석에 마련된 책상에 앉아 계시고 근무를 하시는 직원분에 따라서
사진 촬영에 필요한 일들은 상황이 달라집니다.
스마트폰으로 사진 촬영을 하면서 전시관을 둘러보는 관람은 반갑게 맞아주시는데
뚱뚱한 남자가 들고 있는 애정이 싸악 가시는 고물 카메라 광학 제품을 전문 카메라 장비로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리지만 카메라 광학 제품을 손에 들고 사진 촬영을 하면서 찾아오는
모습에 대해서 썩 내켜 하시지 않는 반색을 하면서 싫어하시는 모습을 뵐수가 있었습니다.
1층에서 안내 데스크에 앉아서 근무를 하시는 직원분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양해를 구하고
말씀을 드려도 처음에 카메라 광학 제품을 손에 들고 사진 촬영을 하는 일들에 대해서
내켜 하시는 기색은 보여주지 않으시고 계시다가 나중에 알아서 하라고 사진 촬영에 대해서
허락을 받았지만 요즘 험악한 무서운 세상은 고물 중고 카메라 광학 제품에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도 싫어하시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엘리베이터 장비 기계의 자동문이 열리면 정면에 눈으로 보이고 만날수 있는
관람객 분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동선을 따라서 천천히 둘러보면서 관람을 할수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선생님의 어린시절에 태어난 고향과 생활에 대해서 남겨진
흑백 사진 자료와 기록을 토대로 내용을 작성을 하면서 벽면에 가득하게 적혀져 있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선생님께서 다녔던 모교 국민학교의 이름과 현재의 달라진 모습과
학교를 다닐때 친구들과 함께 하면서 촬영한 사진 자료와 얼굴을 공개를 하면서 만났습니다.
관람 내부 시설에 만들어진 동선을 따라서 천천히 길을 걸으면서
관람을 하면서 다음에 만나는 전시 시설은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선생님이
고등학교 졸업을 마치고 없는 돈을 모두 털어서 차비를 어렵게 구해서
서울특별시 지방을 찾아가서 상경을 하면서 동대문 지역에 위치한 봉제 공장에
들어가고 취업한 추억의 옛날 이야기들에 대해서 벽면을 가득하게 메꾸고 있습니다.
평화 시장 골목길 구석에 자리를 잡은 봉제 공장의 모습과 어린 나이에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부양의무를 위해서 하루에 14시간의 고강도 노동을 하면서 고생을 하시는
지금은 할아버지 , 할머니 어르신 나이가 되어버린 지금의 우리에 후손들이 편하게 발을 뻗으며
평화롭고 풍족한 세상에서 살아갈수가 있도록 밑거름의 원동력이 되어 주셨던 고마운 분들의 소중한
대한민국 역사의 기록에 남겨질 중요한 흑백 필름 사진 자료가 남겨져 있어서 1970년대 당시에
생활 모습을 엿볼수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기념관 3층 전시관 시설을 둘러보면은
1970년에 근무를 하시고 일을 하셨던 봉제 공장 내부에 시설을 고증을 거쳐서
똑같이 복원을 시켜서 만들어진 시설을 만나서 관람을 할수가 있었습니다.
1970년에 봉제 공장 내부의 모습과 똑같이 만들어진 시설 내부에 들어가면은
안되고 눈으로만 쳐다보면서 시설을 관람을 하시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신장이 커다란 사람은 허리를 곧게 쭈욱 펴기가 어렵고 힘든 열약한 작업
환경에서 우리네 어르신 할아버지 , 할머니 분들이 고생을 하시면서 일을 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선생님이 학교를 다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힙겹고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봉제 공장에 취업을 하면서 똑같이 열약한
환경에서 근무를 하면서 고생한 분들과 간만에 짧은 소풍과 비슷한 회사에서
만들어진 회식 자리에서 여성 근로자분들과 멋쟁이 선글라스를 끼고 촬영한
흑백 필름 사진 자료를 공개를 하면서 보여주셔서 만났습니다.
1970년대 생활 모습에 대해서 자세히 몰라서 근처의 시장에서 구입을 했지만
선글라스 악세사리를 사용을 했다는 몰랐던 당시에 생활 모습에 대해서 알수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선생님께서 꿈꾸는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을
위해서 바라고 원하는 이상의 현실에 대해서 기록이 남겨진 모습을
관람 시설을 둘러보면서 만났습니다.
지금의 2021년 현재와 사뭇 다르지만 1970년에
하루 8시간 근무
(해외 국가 선진국에서만 가능한 현실과 대한민국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꿈이었습니다.)
일요일 날짜는 무조건 휴식을 갖고 쉬는 날짜
회사내 교육에 필요한 재단을 설립을 하면서 교육을 받을수 있도록
따뜻하게 배려를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모르고 있지만 한국 전쟁이 끝나고 1950년 이후부터
1970년에 대한민국의 생활 모습은
여자가 어디서 무슨 학교를 다니고 교육을 받는다고 지랄을 하고 자빠졌냐
오빠가 학교를 다니는데 어디서 지지배가 재수에 옴붙게 만들지 말고
집에서 가만히 집안 일이나 도와가면서 학교를 다닐 생각은 꿈에도 하지를 말거라
여자가 학교를 다니고 수업을 들으며 배움에 대한 간절한 열망에 대해서
무시를 당하고 가난한 집이 많아서 제대로 국민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글을
배우거나 깨우치지 못한 지금의 할아버지 , 할머니 , 어르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계시지 않지만 뚱뚱한 남자의 아버지께서도 마찬가지로 집안 형편이
어렵고 가난하셔서 국민학교까지만 겨우 수업을 배우고 들으며 교육을 받았던
일들이 전부였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선생님의 소중한 가족 부모님 故人
어머님께서 살아 생전에 사용을 하셨던 물품 신발과 자녀분들의 연락처가
빼곡하게 적혀진 전화번호부 수첩 작년에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통해서
수여를 하면서 받은 표창장 상장이 전시가 되었습니다.
故人어머님이 직접 자필로 빼곡하게 그리운 사람들 아이들의 전화번화와 이름이
자세하게 기재가 되어서 적혀진 손때가 묻어서 가득한 유품을 만나서 한참을 서서
관람을 했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선생님께서 근로자 , 노동자를 위해서
자신의 이상과 꿈이 담긴 현실속에서 필요한 회사의 설립 목적에 대해서
자세한 근무 조건에 관련된 내용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적혀져 있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선생님 사후 이후에 만들어지면서 출범한
노동 조합원에 관련된 활동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수가 있는 모습이
전시가 되어서 만났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기념관 3층 전시관 내부 시설은
창문 밖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면은 청계천 물이 흐르는 모습이 보이고
책장에 다양한 책들이 진열이 되어서 구석에 마련된 소파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을수 있는 휴식 공간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도 빨빨 거리고 돌아다녔더니 뚱뚱한 남자는 왼쪽 고관절 다리가 아파서 한참을
소파 의자에 앉아서 잠시 책을 읽으며 30년만에 독서의 시간과 휴식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선생님께서 자필로 직접 작성을 하면서
남겨진 시집 문장 내용의 작품이 평소에 선생님 자신이 꿈꾸고 원하는
학교 건물 내부에 교실 모습을 재현을 하면서 만들어진 전시관 공간에
자리를 잡아서 글귀 문장을 읽을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선생님께서 서울에 상경을 하시면서
동대문 지역에 위치한 봉제 공장에 근무를 하면서 마련된 회식 자리와 비슷한
형태로 진행된 야외 체육 대회를 참가를 하면서 함께 고생을 하는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담겨진 흑백 필름 사진 자료를 가지고 슬라이드
형식의 자료로 만들어서 폐관 시간까지 상영을 하면서 만날수 있습니다.
흑백 필름 사진 , ppt 슬라이드 사진 자료를 잠시 서서 관람을 하면서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면서 지내고 계실지 문득 그런 궁금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당연히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1970년에 관련된 한국 언론에 보도된
뉴스 기사 내용 자료를 스크랩 작업 처리를 하면서 1개씩 개별로 만들어진
책상의 바닥에 놔두고 보관을 해놨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선생님의 사후 이후에 대한민국의 노동에 관련된 달라진
모습들과 남겨진 분들이 용감한 모습에 커다란 용기를 내어서 노조 활동을 시작하면서
대한민국 사회에 부당함에 맞서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이후에 노조 활동에 관련된
목표를 세워서 진행을 해왔던 일들에 대해서 성과와 활동 내용에 대해서 남겨진 기록을
가지고 소중하게 귀중한 자료를 보관을 해오면서 전시관에서 만날수 있었습니다.
흑백 필름 사진 , ppt 자료 형식처럼 만들어진 귀중한 흑백 사진 자료는
1970년에 함께 하면서 고생한 수많은 분들이 한때는 현실에 아픈 시름과 괴로움을 잠시
잊어버리고 커다란 예쁜 웃음을 보여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흑백 사진 필름 자료에 담겨져 있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故人전태일 기념관에 찾아가서 1970년에 대한민국의 열약한
노동 현실 부당한 일들에 용감하게 맞서서 커다란 목소리를 내면서 외치고
활동을 하셨던 당시에 생생한 현장의 모습이 떠올라서 마음이 아픕니다.
대한민국은 2021년 지금 현재도 마찬가지로 당연히 과거의 옛날보다는 좋아졌다고
눈에 보이는 모습을 가지고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지만 여전히 부당한 일들은
세상의 여기 저기 곳곳에서 멈추지 않아서 대한민국 국가는 아직도 갈길이 멀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따뜻하게 배려를 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을 할줄 알고 함께 앞으로
나가는 그런 따뜻한 세상이 찾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입니다.